낮에 쓰고 밤에 고친 편지

이 편지를 선택한 당신에게

일주일 전 어느 날 꿈을 꿨습니다. 복잡한 장터에서 누군가에게 소리치고 있었어요. 상대방은 제 말이 끝날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렸습니다. 말이 끝나자 웃으며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그 말이 꽤 마음에 들어 당황하며 깼던 것 같아요.

“당신 퓨리오사* 같군요.”

나에게 퓨리오사는 강인한 사람이자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이 있었기에 우쭐했습니다. 마음에 들었어요. 내가 퓨리오사 같다니. 소리치길 잘했군. 뭐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꿈을 꾼 그날은 온종일 얕고 넓게 퍼진 우쭐한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이 꿈이 며칠 뒤 일어날 사건의 복선이었다는 것은 까맣게 몰랐거든요.

똑…똑…똑…

그로부터 며칠 후 작은 비구름이 지나갔습니다. 본격적인 여름 장마가 시작되기 전 예고편 같은 아주 작은 비였어요. 저에게 비는 작은방 천장의 누수가 다시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래된 공동주택의 꼭대기 층에 사는 저는 오랫동안 누수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비구름이 지나간 날 여느 때처럼 작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몇 년 동안 공동주택의 관리실과 실랑이를 해왔지만, 그동안 견고하게 쌓아 올린 쾌쾌한 비리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더위에 지쳐 싸울 힘이 없었고 모른 척 지나갔습니다. 매일 뉴스에서는 다가올 장마를 ‘물 폭탄’에 비유하며 대비해야 한다는 소식을 쏟아내고, 물.폭.탄.이라는 단어는 ‘불볕더위’만큼이나 불안증을 높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정이 넘어 퇴근해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게시글이 게시판에 붙어있었습니다.

땡월 땡일 ~ 땡월 땡일 : 옥상 방수 공사 예정 (옥상 일부)
예산: 땡땡땡 원.

머리를 울린 건 옥상 방수 공사도 아니고, 일정도 아니고, 예산도 아니었습니다. 게시글 구석에 쓰여 있는 ‘옥상 일부’였습니다. 물은 작은 틈만 있어도 기가 막히게 스며들어 누수를 만들고, 일부를 완벽하게 보수한다면(불가능한 이야기지만요) 다른 일부로 스며들어 더 큰 누수를 만들기도 합니다. 물은 그렇습니다. 소중하지만 무섭기도 해요. 아파트의 층마다 ‘옥상 일부’만 공사를 한다고 붙여놓은 관리실의 몇몇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다 쓴 방수액 통이 한쪽에 모여있고, 일부에 방수액이 발려있었습니다. 예상대로 몇 군데는 태초의 모습 그대로였어요. 밤새 양쪽으로 몸을 번갈아 돌려가며 아침이 오길 기다렸습니다. 관리실의 대답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올해는 참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 분노의 공동주택 속 퓨리오사가 되려는 참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다시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느 해 여름, 주민 동의 없이 관리실은 옥상 단열 공사를 시행합니다. 무슨 일인지 멀쩡했던 옥상은 공사 후에 비가 오면 물이 새기 시작했어요. 저는 단열 공사를 한 전년도 봄 이 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관리실의 사정, 주민의 성향, 이웃의 존재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습니다. 착실하게 데이터를 쌓은 후 이 아파트에는 동네 토박이들의 모임이 있고, 그 모임이 곧 관리실 멤버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좋게 말해 친목 모임이고, 문제를 들추자면 비리의 온상인 셈이죠.

게시글을 본 다음 날 아침, 저는 관리실의 주요 멤버인 주민대표와 통화를 합니다. 예상 답변 그대로였습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발언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같은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참느라 하지 못했던, 단전에 쌓여있던 용암처럼 뜨거운 말을 뱉었습니다. 20분 정도 고함을 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슬프지 않았는데 눈물이 났어요. 물 폭탄보다 대단한 아침이 지나가고, 평소 쓰지 않았던 힘을 쓴 탓인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리 통증도 심해졌습니다.

덕분에 출근길에 택시를 탔습니다. 평소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 교통수단 중 하나입니다. 기사님은 내비게이션대로 운전하셨어요. 저는 목적지까지 가는 다른 경로를 알고 있었습니다. 거리상 조금 돌아가지만, 시내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기 때문에 오히려 일찍 도착할 수 있는 경로입니다. 그 길을 말씀드렸더니 몇 분 후 대화를 청하셨습니다. 그 길을 아는 사람은 목적지 근처 경찰서에 근무하는 사람들뿐이라고, 경찰서에 근무하냐고 물으셨어요.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목적지가 경찰서 앞인 건 맞지만, 경찰서 건너편 인쇄소가 저의 최종 목적지였거든요. 그때부터 기사님은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본인 아버지의 이야기였어요. 구십이 넘어 돌아가셨는데 젊은 시절 경찰이셨대요. 혹독한 시대, 탄압의 시대를 관통한 경찰이셨답니다. 다행인 건 건강하게 사시다가 명예롭게 돌아가셨대요. 이 길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마치 아버지와 직업이 같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아요. 자녀의 이야기를 하는 기사님은 봤어도 부모의 이야기를 하는 기사님은 처음이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목소리에 가시지 않은 슬픔이 느껴졌습니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고, 차 문을 여는 찰나 기사님의 씩씩한 한마디가 며칠 동안 활화산 같았던 저의 마음을 잠식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작은방은 여전히 물방울이 떨어집니다. 싸움 이후로 방수액은 더 발랐지만, 방수액으로 해결될 누수였다면 몇 년 동안 고생하지 않았겠죠. 택시에서 내린 후 제 마음은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건강히 지내라는 누군가의 한마디가 마음에 생긴 누수를 단번에 고쳐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도 이 편지를 끝까지 읽어주신 당신에게 그런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마음의 누수를 멈춰 줄 우주 최강방수액 같은 그런 말이요. 말뿐이라면 몰라도 마음을 담으면 그 이상이 된다는 걸 택시 기사님에게 배웠습니다.

건강하세요.
그리고 이 여름 그 어떤 물 폭탄과 불볕더위 같은 공격에도 편안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원희 드림

추신. 이 편지를 쓰는 동안 장마의 본편이 시작되었고,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을 들었습니다. 퓨리오사만큼 강렬한 울림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야니네 얀센의 연주 버전을 들었습니다.

*퓨리오사: 영화감독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속 등장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