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컴퓨터와 외장하드가 바뀔 때마다 삭제되지 않고 살아남은 폴더가 있다. 폴더명은 ‘소설의 조각들’. 그때그때 떠오른 문장이나 장면을 무작위로 써놓은 저장고 같은 곳이다. 문장 수로 따지면 방대한 양이지만, 실제 쓸모있는 문장은 몇 개 없다. ‘소설의 조각들’만큼 오랜 시간 따라다닌 다른 폴더는 ‘마감 중 조각들’이다. 자발적인 마감이 아닌 누군가 정해준 마감을 지켜야 하는 직업인으로써 나는 언제나 마감중이었고, 마감 중에 생기는 단편의 일들을 작성해놓은 것이다. 길을 가다 마주친 사람의 모습, 버스 안에서 바라본 거리의 모습, 옥상에 죽어 있는 백로의 모습, 옆집 할머니의 친목생활 등등. 서로 관련은 없어 보이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변에서 일어나고 없어지는 장면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글 모음이다. 일기를 쓰기에는 번거롭고, 어느 순간은 밀봉된 기억으로 잡아두고 싶다면 조각 글 쓰기를 추천한다. 이 책이 누군가에게 조각 글을 쓸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새로운 조각들
(2023~ )

> 수년 전, 오랜 시간 써둔 글을 홈페이지에 올린 걸 본 친구 하나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손가락에 힘이 빠진 것 같아 읽기 좋다는 말을 해줬다. 그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 계속 써도 되겠구나 싶었다.

일 년 전, 이제는 그만 쓰겠다고 마음속으로만 다짐하고 살던 어느 날 상담 선생님이 “그냥 계속 쓰세요 뭘 고민하세요”라고 툭 던진 말에 걍 쓰기로 마음을 돌리고(이쯤 되면 팔랑귀) 책까지 만들었다.

불안이 용솟음치듯 올라올 때는 어떤 것에까지 반응하냐면 전철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사고 발생 시 대피요령 영상만 봐도 이미 내가 탄 열차는 사고가 일어나 대피해야 할 것 같아 심장이 터질듯하다. 불안이 용솟음칠 때만 그런다.

12월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사랑하는 언니가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피아노 연주회 티켓을 선물해줬기 때문이다. 언니는 종종 언니가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는데 나는 밑으로 동생이 없어서 행복하다. 그러므로 언니의 부러움이 무엇인지 잘 안다. 동시에 동생이 없음에 안도한다. 나는 언니 역할은 못 할 것 같거든.



> 오랜만에 옆집 할머니와 마주쳤다. 생활 리듬이 달라서 운 좋으면 주말 낮에 마주칠 수 있다. 오랜만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과하게 반가워하셨다. 신랑 어디갔냐고 물으셔서 나는 신랑이 없다고 말씀드렸다.(몇 년째 같은 대답 중) 옆집에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든든하다고, 추수감사절이라 교회 다녀오시는 길이라고, 이불 빨래 걷으러 간다니까 부지런하다고, 반갑고 외로워서 이렇게 말이 많다고. 복도에 서서 이야기 듣다가 집으로 들어가 잘 익은 알배추 한 통을 가져다드렸다. 본인이 쌈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냐며 좋아하신다. 젊을 때 빨리 애기 낳으라는 마무리까지. 옆집 할머니에 대한 불만은 옆집 할머니만 모르신다.


>길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제대로 끄지 않은 담배를 길바닥에 휙 버리고 가는 사람을 보면서 그에게 남은 인생이 길에 버려진 담배꽁초같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 늦은 밤 방송하는 라디오의 채팅창을 구경하면 매일 찾아오는 사람, 종종 오는 사람, 끊임없이 말을 남기는 사람,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사람, 비슷한 사람 같지만 다 다른 사람이 모여 각자의 말을 한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 많다.


>
북한강 위를 같은 속도로 나는 새 두 마리를 보았다.
한강에서는 물에 바짝 붙어 나는 새 한 마리를 보았다.



> 선반에 쌓아뒀던 패딩을 하루에 하나씩 세탁하고 있다. 1번 패딩이 작은 방 건조대에 널찍이 누워있어 손으로 비비고 탁탁 털어 뭉쳐있는 털을 펼친다. 땅땅하게 뭉쳐있던 털들은 손으로 몇 번 비비면 부드럽게 펼쳐진다. 그 사이에 옥상에서는 3일째 사용하지 않고 엉켜있는 오래된 전선을 치우는 소리가 들린다. 드르륵드르륵. 아저씨 혼자서 3일 동안 넓은 옥상의 전선을 자르고 돌돌 말아 한쪽에 치워놓는다. 꽤 많은 양의 필요 없는 전선이 곳곳에 모여있는 걸 봤는데, 분명 치웠는데 티가 안 난다. 갑자기 드는 조바심. 아저씨처럼 나도 뭔가 열심히 했는데 티가 안 나면 어쩌지. 아무도 모르면 어쩌지.


>
Áspri Méra Ke Ya Mas.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



>
눈이 내리면 듣는 노래가 있어요
비가 내리면 듣는 노래가 있어요
두 곡 모두 같은 사람이 불러요



>노인이 공원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아저씨는 뛰어서 세 바퀴를 돈다. 강아지들은 정신없이 킁킁거리고, 이제 막 두 발로 생을 시작한 아이들은 방향이 제각각이다. 이 공원에서 나만 한 곳에,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 피로 누적으로 오전 박물관 근무는 병가를 내고, 쓰러져 있다가 오후에는 정신력을 발휘해 교정 마감을 하고 있다. 저녁을 손수 해 먹기에는 힘에 부쳐 죽을 주문했다. 배달된 죽을 가지러 2층으로 내려가는데 3층 중앙계단 앞에 서성이는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목 라인을 따라 풍성하게 박음질 한 하얀 레이스가 돋보이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계셨다. 양손에는 활짝 펼친 손수건이 들려있었고, 사람을 기다린 눈치였다. 3층에 다 내려왔을 때쯤 조심스럽게 다가오시더니 속삭이셨다.

“죄송한데 제가 오십견이어서요. 뒤에 지퍼 좀 내려주실 수 있어요?”
“어, 어디까지 내려드릴까요?”
“그냥 허리까지 쭉이요.”

찌익-

아주머니가 고맙다며 양손에 든 손수건을 휙 돌려 등 뒤로 보내더니 드러난 부분을 가리고 황급히 복도 안쪽 집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한 층 더 내려가 배달된 죽을 들고 7층으로 올라가면서, 이런 식의 도움은 아주머니와 나, 둘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십견 멀지 않았다.



> 악몽의 소재가 엘리베이터에서 머리카락으로 옮겨갔다. 이제 갇히는 꿈은 더이상 없다. 바리깡으로 머리카락을 밀어버리거나 손빗질을 하면 한움쿰씩 쑥쑥 빠지거나 또다른 자리에 원형 탈모가 생겨 소리를 지르는 종류의 꿈을 돌려가며 꾼다. 1급수와 맞먹는 무의식의 투명함에 감탄한다.


>
어떤 집단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지내는 경험도 소중하다.


> 만난 사람 중에 함께 순댓국을 먹으러 가면 나의 순댓국에 깍두기 세 개를 넣었으면 하고 적극적으로 권했던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물에 젖은 깍두기가 불편해 한사코 거절했는데 어느날엔가 또 권하길래 못 이기는 척 넣었다. 다 먹고 나와서는 추운 날씨 탓을 하며 바짝 붙어 걸으며 물었다.

“나는 너에게만 권해. 너무 뜨거운 순댓국의 온도를 낮춰주면서 간이 잘 배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거든. 그걸 같이 경험하고 싶었어.”

너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겨울이 오고야 말 것 같은 어스름한 저녁에 동네길을 걸을 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 꾼 꿈 중에 가장 어이없는 것은 로베르트 발저의 책을 들어주다가 타야하는 버스를 놓쳤던 것이다. 나는 못 탔고, 발저는 탔다.


>
동료와 각자의 이름으로 이행시를 지었다.

은은하게
지랄맞다

원인불명
희대의 도라이



> 자외선으로부터 두피를 보호하기 위해 늦봄부터 양산을 챙긴다. 오늘도 횡단보도에서 가방에 챙겨둔 양산을 꺼내려는 찰나 앞에 모여있던 십대 친구들이 멀리서 다가오는 양산 쓴 친구를 향해 소리친다.
“야! 할망구냐? 양산 접어!”

양산을 꺼내다가 도로 넣었다. 



>
전봇대에 기댄 나뭇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