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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와 외장하드가 바뀔 때마다 삭제되지 않고 살아남은 폴더가 있다. 폴더명은 ‘소설의 조각들’. 그때그때 떠오른 문장이나 장면을 무작위로 써놓은 저장고 같은 곳이다. 문장 수로 따지면 방대한 양이지만, 실제 쓸모있는 문장은 몇 개 없다. ‘소설의 조각들’만큼 오랜 시간 따라다닌 다른 폴더는 ‘마감 중 조각들’이다. 자발적인 마감이 아닌 누군가 정해준 마감을 지켜야 하는 직업인으로써 나는 언제나 마감중이었고, 마감 중에 생기는 단편의 일들을 작성해놓은 것이다. 길을 가다 마주친 사람의 모습, 버스 안에서 바라본 거리의 모습, 옥상에 죽어 있는 백로의 모습, 옆집 할머니의 친목생활 등등. 서로 관련은 없어 보이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변에서 일어나고 없어지는 장면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글 모음이다. 일기를 쓰기에는 번거롭고, 어느 순간은 밀봉된 기억으로 잡아두고 싶다면 조각 글 쓰기를 추천한다. 이 책이 누군가에게 조각 글을 쓸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
새로운 조각들
(2023~ )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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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천장에는 작동 여부를 알 수 없는 화재경보기가 하나 붙어있어. 이 집에 살기 시작한 날부터 몇 년 간 고장일까 궁금했거든. 근데 그제 밤, 그 경보기 아래서 바글바글 끓던 전기포트의 수증기에 엄청난 굉음을 내는거야. 내 심장의 수명은 깎였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걸 확인해서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
옆집 할머니는 모든 걸 복도에 말리셔. 고사리, 표고버섯, 양파 등등. 문제는 썩을 때까지 말리신다는 거야. 더 문제는 그곳에서 생긴 각종 무언가들이 복도 끝 우리 집으로 옮겨온 다는 거지. 그런 할머니가 몇 주동안 두문불출하셨고, 종래에는 못 보던 젊은 여성이 큰 쓰레기봉투에 집안 살림을 정리하시는거야. 가슴이 덜컹했어. 마지막을 다른 곳에서 보내신 줄 알고. 그런데 며칠 후, 복도에 새로운 양파가 등장한 걸 보고 할머니의 컴백을 알아차렸어. 할머니는 건강하셔. 나보다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벌레쯤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
몇 년 만에 조용한 곳으로 잠시 떠났어. 일을 막 끝낸 뒤라 피곤했지만 그래도 좋았어. 열차에서 내려 숙소까지 갈 수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어. 배차표에는 버스 아이콘이 보이지 않았지만, 금세 뜰거라고 믿었지. 비도 내리고, 강풍주의보도 있었지만 참을만했어. 메고 있던 배낭이 조금 무거워도 견딜만했거든. 다행히 버스 정류장 앞에는 작은 편의점이 있었고, 그곳에 들어가 기다리기로 했어.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 소식이 없는 거야. 택시를 불렀어. 택시가 없대. 그럼 걸어서라도 가보자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나섰는데 눈앞에는 이미 깜깜해 보이지 않는 산길과 더 세차게 부는 비바람에 서둘러 편의점으로 다시 들어왔지. 운수회사에 전화를 걸었어. 지금 버스가 없는 건 당연하대. 운행을 안 하니까. 마침 기사님의 저녁식사 시간이고, 배차시간은 105분이래. 그러니까 운행을 재개하려면 165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마침 그 차가 막차래. 적어도 오늘 안에는 숙소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
이 밖에도 좋게 생각하기로 한 일은 매일 생기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
> 수년 전, 오랜 시간 써둔 글을 홈페이지에 올린 걸 본 친구 하나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손가락에 힘이 빠진 것 같아 읽기 좋다는 말을 해줬다. 그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 계속 써도 되겠구나 싶었다.
일 년 전, 이제는 그만 쓰겠다고 마음속으로만 다짐하고 살던 어느 날 상담 선생님이 “그냥 계속 쓰세요 뭘 고민하세요”라고 툭 던진 말에 걍 쓰기로 마음을 돌리고(이쯤 되면 팔랑귀) 책까지 만들었다.
불안이 용솟음치듯 올라올 때는 어떤 것에까지 반응하냐면 전철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사고 발생 시 대피요령 영상만 봐도 이미 내가 탄 열차는 사고가 일어나 대피해야 할 것 같아 심장이 터질듯하다. 불안이 용솟음칠 때만 그런다.
12월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사랑하는 언니가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피아노 연주회 티켓을 선물해줬기 때문이다. 언니는 종종 언니가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는데 나는 밑으로 동생이 없어서 행복하다. 그러므로 언니의 부러움이 무엇인지 잘 안다. 동시에 동생이 없음에 안도한다. 나는 언니 역할은 못 할 것 같거든.
> 오랜만에 옆집 할머니와 마주쳤다. 생활 리듬이 달라서 운 좋으면 주말 낮에 마주칠 수 있다. 오랜만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과하게 반가워하셨다. 신랑 어디갔냐고 물으셔서 나는 신랑이 없다고 말씀드렸다.(몇 년째 같은 대답 중) 옆집에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든든하다고, 추수감사절이라 교회 다녀오시는 길이라고, 이불 빨래 걷으러 간다니까 부지런하다고, 반갑고 외로워서 이렇게 말이 많다고. 복도에 서서 이야기 듣다가 집으로 들어가 잘 익은 알배추 한 통을 가져다드렸다. 본인이 쌈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냐며 좋아하신다. 젊을 때 빨리 애기 낳으라는 마무리까지. 옆집 할머니에 대한 불만은 옆집 할머니만 모르신다.
>길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제대로 끄지 않은 담배를 길바닥에 휙 버리고 가는 사람을 보면서 그에게 남은 인생이 길에 버려진 담배꽁초같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 늦은 밤 방송하는 라디오의 채팅창을 구경하면 매일 찾아오는 사람, 종종 오는 사람, 끊임없이 말을 남기는 사람,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사람, 비슷한 사람 같지만 다 다른 사람이 모여 각자의 말을 한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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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 위를 같은 속도로 나는 새 두 마리를 보았다.
한강에서는 물에 바짝 붙어 나는 새 한 마리를 보았다.
> 선반에 쌓아뒀던 패딩을 하루에 하나씩 세탁하고 있다. 1번 패딩이 작은 방 건조대에 널찍이 누워있어 손으로 비비고 탁탁 털어 뭉쳐있는 털을 펼친다. 땅땅하게 뭉쳐있던 털들은 손으로 몇 번 비비면 부드럽게 펼쳐진다. 그 사이에 옥상에서는 3일째 사용하지 않고 엉켜있는 오래된 전선을 치우는 소리가 들린다. 드르륵드르륵. 아저씨 혼자서 3일 동안 넓은 옥상의 전선을 자르고 돌돌 말아 한쪽에 치워놓는다. 꽤 많은 양의 필요 없는 전선이 곳곳에 모여있는 걸 봤는데, 분명 치웠는데 티가 안 난다. 갑자기 드는 조바심. 아저씨처럼 나도 뭔가 열심히 했는데 티가 안 나면 어쩌지. 아무도 모르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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Áspri Méra Ke Ya Mas.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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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면 듣는 노래가 있어요
비가 내리면 듣는 노래가 있어요
두 곡 모두 같은 사람이 불러요
옆집 할머니는 모든 걸 복도에 말리셔. 고사리, 표고버섯, 양파 등등. 문제는 썩을 때까지 말리신다는 거야. 더 문제는 그곳에서 생긴 각종 무언가들이 복도 끝 우리 집으로 옮겨온 다는 거지. 그런 할머니가 몇 주동안 두문불출하셨고, 종래에는 못 보던 젊은 여성이 큰 쓰레기봉투에 집안 살림을 정리하시는거야. 가슴이 덜컹했어. 마지막을 다른 곳에서 보내신 줄 알고. 그런데 며칠 후, 복도에 새로운 양파가 등장한 걸 보고 할머니의 컴백을 알아차렸어. 할머니는 건강하셔. 나보다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벌레쯤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
몇 년 만에 조용한 곳으로 잠시 떠났어. 일을 막 끝낸 뒤라 피곤했지만 그래도 좋았어. 열차에서 내려 숙소까지 갈 수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어. 배차표에는 버스 아이콘이 보이지 않았지만, 금세 뜰거라고 믿었지. 비도 내리고, 강풍주의보도 있었지만 참을만했어. 메고 있던 배낭이 조금 무거워도 견딜만했거든. 다행히 버스 정류장 앞에는 작은 편의점이 있었고, 그곳에 들어가 기다리기로 했어.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 소식이 없는 거야. 택시를 불렀어. 택시가 없대. 그럼 걸어서라도 가보자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나섰는데 눈앞에는 이미 깜깜해 보이지 않는 산길과 더 세차게 부는 비바람에 서둘러 편의점으로 다시 들어왔지. 운수회사에 전화를 걸었어. 지금 버스가 없는 건 당연하대. 운행을 안 하니까. 마침 기사님의 저녁식사 시간이고, 배차시간은 105분이래. 그러니까 운행을 재개하려면 165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마침 그 차가 막차래. 적어도 오늘 안에는 숙소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
이 밖에도 좋게 생각하기로 한 일은 매일 생기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
> 수년 전, 오랜 시간 써둔 글을 홈페이지에 올린 걸 본 친구 하나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손가락에 힘이 빠진 것 같아 읽기 좋다는 말을 해줬다. 그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 계속 써도 되겠구나 싶었다.
일 년 전, 이제는 그만 쓰겠다고 마음속으로만 다짐하고 살던 어느 날 상담 선생님이 “그냥 계속 쓰세요 뭘 고민하세요”라고 툭 던진 말에 걍 쓰기로 마음을 돌리고(이쯤 되면 팔랑귀) 책까지 만들었다.
불안이 용솟음치듯 올라올 때는 어떤 것에까지 반응하냐면 전철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사고 발생 시 대피요령 영상만 봐도 이미 내가 탄 열차는 사고가 일어나 대피해야 할 것 같아 심장이 터질듯하다. 불안이 용솟음칠 때만 그런다.
12월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사랑하는 언니가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피아노 연주회 티켓을 선물해줬기 때문이다. 언니는 종종 언니가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는데 나는 밑으로 동생이 없어서 행복하다. 그러므로 언니의 부러움이 무엇인지 잘 안다. 동시에 동생이 없음에 안도한다. 나는 언니 역할은 못 할 것 같거든.
> 오랜만에 옆집 할머니와 마주쳤다. 생활 리듬이 달라서 운 좋으면 주말 낮에 마주칠 수 있다. 오랜만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과하게 반가워하셨다. 신랑 어디갔냐고 물으셔서 나는 신랑이 없다고 말씀드렸다.(몇 년째 같은 대답 중) 옆집에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든든하다고, 추수감사절이라 교회 다녀오시는 길이라고, 이불 빨래 걷으러 간다니까 부지런하다고, 반갑고 외로워서 이렇게 말이 많다고. 복도에 서서 이야기 듣다가 집으로 들어가 잘 익은 알배추 한 통을 가져다드렸다. 본인이 쌈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냐며 좋아하신다. 젊을 때 빨리 애기 낳으라는 마무리까지. 옆집 할머니에 대한 불만은 옆집 할머니만 모르신다.
>길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제대로 끄지 않은 담배를 길바닥에 휙 버리고 가는 사람을 보면서 그에게 남은 인생이 길에 버려진 담배꽁초같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 늦은 밤 방송하는 라디오의 채팅창을 구경하면 매일 찾아오는 사람, 종종 오는 사람, 끊임없이 말을 남기는 사람,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사람, 비슷한 사람 같지만 다 다른 사람이 모여 각자의 말을 한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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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 위를 같은 속도로 나는 새 두 마리를 보았다.
한강에서는 물에 바짝 붙어 나는 새 한 마리를 보았다.
> 선반에 쌓아뒀던 패딩을 하루에 하나씩 세탁하고 있다. 1번 패딩이 작은 방 건조대에 널찍이 누워있어 손으로 비비고 탁탁 털어 뭉쳐있는 털을 펼친다. 땅땅하게 뭉쳐있던 털들은 손으로 몇 번 비비면 부드럽게 펼쳐진다. 그 사이에 옥상에서는 3일째 사용하지 않고 엉켜있는 오래된 전선을 치우는 소리가 들린다. 드르륵드르륵. 아저씨 혼자서 3일 동안 넓은 옥상의 전선을 자르고 돌돌 말아 한쪽에 치워놓는다. 꽤 많은 양의 필요 없는 전선이 곳곳에 모여있는 걸 봤는데, 분명 치웠는데 티가 안 난다. 갑자기 드는 조바심. 아저씨처럼 나도 뭔가 열심히 했는데 티가 안 나면 어쩌지. 아무도 모르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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Áspri Méra Ke Ya Mas.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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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면 듣는 노래가 있어요
비가 내리면 듣는 노래가 있어요
두 곡 모두 같은 사람이 불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