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의 이야기
“세계의 중심! 서울의 중심! 르네상스의 도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영신은 주민센터 입구에 붙어있는 현수막 문구를 읽어본다. 이 동네가 언제부터 세계의 중심이었을까. 고민해 보지만, 들고 있는 공구 세트가 무거워 금세 휘발된다. 주민센터에서 각종 공구를 빌려주는 건 좋은 복지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집안에 무언가를 고쳐야 할 때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영신만 사용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언제나 깨끗하다. 한 달 전에 빌렸을 땐 드릴 손잡이 바닥에 본인만 알아볼 수 있는 동그라미 표식을 그려 놨는데 그 부분도 그대로다. 수납장이 좁아 잠시 주민센터에 맡겨 놓은 본인의 물건 같은 기분이다.

영신이 드릴을 빌린 건 창틀의 틈새를 막기 위해서다. 두꺼운 테이프를 붙여봤지만, 공사 소음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얇은 나무판을 창틀 위에 박으면 좀 괜찮을 것 같았다. 벌써 1년째 영신은 매일 아침 6시 공사장 소음에 놀라 깬다. 온 잠을 빼앗긴 지 1년째다. 날카로운 그라인더 소리, 둔탁한 망치 소리, 철근을 던지는 소리(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 비슷한 시간, 비슷한 소음, 비슷한 간격에 잠에서 깬다. 동네 주민 대부분 잘 적응하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1년 동안 적응하지 못하는 걸 보면 영신의 적응력도 참 더디다. 그런데 왜 적응해야 할까.

영신은 오전 9시가 되면 구청 맑은환경과에 전화를 걸어 주무관과 통화를 한다. 최대한 공손하게 말한다. 공사 현장에 화가 난 것이지, 주무관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네 맑은환경과 김경태 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용은 사거리 공사 현장 소음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네, 선생님 소음으로 아주 괴로우시죠. 저희가 현장에 나가서 지도 편달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불편하신가요?.”

“아침 6시부터 공사를 하시니까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공사를 시작하는 시간을 조금만 늦춰도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저희가 현행법상 공사 시간을 강제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강력하게 지도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담당 주무관은 몇 달째 비슷한 대답으로 지도 편달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지도를 하는지 모르겠다. 시간도, 소음도, 소음의 강도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영신은 기분이 별로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사장 소음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 보상은 소음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의 증거를 수집해야 하고, 소송으로 해결을 봐야 해서 포기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땐 소음 측정기 앱을 틀고 방충망까지 활짝 열어 공사장 쪽으로 팔을 뻗어 휴대폰을 들고 있던 적도 많았다. 낮 시간 주택가의 소음 환경기준은 68dB이지만, 대부분 80dB 이상 측정된다. 충분히 다퉈볼 만하다. 하지만 영신은 변호사를 알아보고, 법원에 나가 피해를 입증할 힘과 돈이 없다. 매달 내고 있는 대출 이자도 빡빡하기 때문이다. 단지 조용한 생활만을 원할 뿐이다.

영신은 방법을 바꿨다. 잠들기 전 모든 창문을 닫았다. 날씨가 점점 더워져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었는데 아직 6월, 참을만하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오래된 이 집은 창틀이 모두 목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놀라 깼다. 다음 방법은 테이프였다. 틈새를 모두 막았다. 창틀에 보이는 모든 틈을 찾아 두꺼운 테이프로 붙였다. 얼핏 보기에는 흉한데 혼자 사는 영신에게 테이프를 떼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놀라 깼다. 지은지 50년이 넘어가는 노후 주택의 단열과 방음이란 얇은 종이짝 같으니 테이프로 막아질 소음이 아니었다. 방법을 살짝 틀어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잠에서 깨는 방법도 마련해 봤다. 공사가 시작하는 오전 6시 보다 10분 빠른 오전 5시 50분, 라디오가 자동 재생되고, 휴대전화에서는 음악이 자동 재생 되도록 설정했다. 며칠은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음악도 곧 소음, 라디오도 곧 소음처럼 느껴졌다.

영신은 다시 방법을 바꿨다. 1T 두께의 합판을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주민센터에서 전동 드릴을 빌리고, 철물점에서 시멘트용 못 한 봉지, 목제용 못 한 봉지를 구입했다. 작은 틈이 보이는 곳곳을 합판으로 가리면 어떨까. 영신의 집은 일반적인 주택의 내부 마감 - 시멘트 벽 위에 단열재 부착, 단열재 위에 합판 부착, 합판 위에 벽지 부착의 순서 - 이 아닌 시멘트 위에 방수 페인트 한 겹, 단열 페인트 한 겹, 모던한 라이트 그레이 페인트로 마무리되어 있다. 한때 유행했던 카페 인테리어, 노출 콘크리트 인테리어에 빠졌던 건 아니다. 집을 수리할 여력이 없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위한 선택이었다. 이 집은 영신의 없던 영혼의 밑바닥부터 삭삭 긁고, 긁어 마련한 첫 번째 주택이었다.

“내 집인데 뭐 어때. 테이프로 발라놓든, 합판을 박아버리든 누가 뭐래. 내가 이 집 주인인데!”

거실 하나, 방 두 개, 화장실 하나. 실평수 10.6평. 투룸이지만, 원룸 같은 투룸. 거실이지만, 주방과 함께 있는 모호한 정체성의 공간. 세탁기, 세면대, 변기가 옹기종기 사이좋게 붙어있어 영신까지 들어가면 눈치 보여 금방 나와야 할 것 같은 화장실. 하나의 위안이 되는 건 오래전에 건축한 건물답게 창문은 시원하게 컸다. 영신이 거주하는 5층은 전망도 괜찮고, 시야도 탁 트여 커튼을 열면 장애물 없이 길게 뻗은 가시거리 덕분에 집이 덜 답답했다. 그 시야를 막는 공사를 시작하기 전까진.

막아야 할 창문은 총 세 개. 120cm x 20cm 1T 합판 4장, 80cm x 20cm 1T 합판 4장, 160cm x 20cm 1T 합판 2장, 80cm x 20cm 1T 합판 2장, 시멘트용 못 한 봉지, 목재용 못 한 봉지, 대여한 전동드릴. 준비 완료! 드릴 사용이 익숙한 영신은 망설임 없이 거실 창 앞에 섰다. 시멘트와 나무 창틀 사이의 미세한 틈을 가리기 위한 정교한 작업! 사방을 막아야 하니까 하루 내내 바쁠 것이다. 매일 영신의 전화로 하루의 업무를 시작했을 맑은환경과 김경태 주무관은 조용한 전화에 기뻐했을까. 모를 일이다.

생각처럼 합판이 평평하게 박히지 않는다. 시멘트 벽과 창틀의 미세한 턱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틈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도 틈이 아닌 것 같다. 틈이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걸까? 두 장까지 시도하다가 영신은 거실 창문 앞에 앉았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단지 조용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고, 공사를 시작하는 시간만 늦췄으면, 그 일을 구청에서 도와주길 바랄 뿐인데. 예의 바른 맑은환경과 김경태 주무관은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공사 현장과 7.3km 떨어진 곳에서 근무하는 김경태 주무관은 무엇이 죄송한 걸까.

처음부터 소음에 과민했던 것은 아니다. 아침이면 작은방에서 큰 방으로 출근하는 영신은 대부분의 일을 집에서 해결한다. 컴퓨터와 복사기, 형광펜, 빨간펜만 있으면 가볍게 업무를 쳐낼 수 있다. 가끔 구입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책이 필요할 때 시내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책을 제외한 필수품, 생활용품은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고, 지금 이 시대와 찰떡궁합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공사가 시작된 날로부터 소음이 덜 한곳으로 피해 보기도 했지만, 업무의 효율을 낮출 뿐. 결국 집이 답이었다. 답안지가 타인에 의해 찢겼으니 영신의 과민함이 늘어가는 건 당연하다.

쌓아둔 합판을 바라보던 영신은 문제의 원인을 없앤다면 아침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맑은환경과 김경태 주무관에게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되고, 전동드릴도 제날짜에 반납할 수 있고, 본드 냄새가 나는 합판을 창틀에 박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소음이 없는 단잠을, 꿀맛 같은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영신은 결심했다. 책상 위에 올려둔 번역 작업의 초고 뭉치를 가방에 넣었다. 현재 3고를 작업중이고, 초고의 원본 파일은 컴퓨터에 있으니 안전한 이면지다. 책상 서랍에 넣어둔 담뱃갑의 뚜껑을 열어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고, 싱크대 틈새에 있는 틈새 슬라이드장에서 식용유를 챙긴다. 밤에는 공사현장이 잠겨있으니 주민센터에서 빌린 망치도 챙긴다. 혹시 모르니 펜치도 챙긴다. 고요한 밤이 되길 기다린다. 내일 아침은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은 기분 좋게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