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마다 떠오르는 게 너에 대한 기억이야
2000년대 초반 나는 누군가에게 종로구에 사는 와타나베 히로코였다. 그 누군가는 의정부에 사는 후지이 이츠키. 우리는 서로의 펜팔 친구였다. 얼굴도 모르고, 본명도 모르는 펜팔 친구. 일주일에 두어 번 흰색 편지봉투에 편지지 몇 장, 작은 초콜릿 몇 개를 담아 테이프로 봉인해 “본인 외 개봉할 시 무서운 일이 생깁니다.”같은 전혀 무섭지 않은 경고 문구를 눌러쓴 펜팔이었다. 내가 왜 히로코 였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이츠키보다 건강해서 였을 거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이와이 슌지, 1995 가 열풍이었고, 영화의 중요한 소재인 펜팔, 손편지는 덤으로 유행이었다. 나의 첫 번째 인터넷 친구. 만남의 장소는 온라인 영화 카페였던 것 같다. 얼마간 편지를 주고받았을까. 아마도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등 각자의 대소사에 치여 펜팔은 자연스럽게 서랍 속으로 들어갔을 거다.
가을에서 겨울로 진입하는 환절기에 알레르기 비염으로 전쟁을 치르고 나면 그제서야 목가적인 생각을 한다. 낙엽은 이미 다 떨어져 길거리 구석구석 쌓여있고, 바람은 칼을 차고 나타나 겨울 목전에 내 발목을 툭툭 친다. 이번 겨울, 나를 찾은 건 손편지다. 와타나베 히로코와 후지이 이츠키가 주고받는 편지로 영화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러브레터>는 추운 겨울이 되면, 참았던 숨을 허공에 토해내는 와타나베 히로코의 옆모습이 담긴 포스터부터 떠오른다. 그다음 차례는 책꽂이 맨 아래칸 오른쪽에 꽂혀있는 OST 음반이다. 광화문 교보문고의 음반 코너가 지금의 만화책 코너에 있던 때, 유독 음반 코너만 어두컴컴하게 느껴지던 때, 벽면에 드문드문 청음이 가능한 큼지막하고 새까만 헤드셋이 있던 때, 한창 펜팔을 주고받던 때, 그때 그 자리에서 구입한 OST다.
왜 이번 겨울에는 펜팔과 음악, 영화가 떠올랐을까 시간을 되감아 보니 H가 보낸 등기 우편이 눈앞에 있었다. 몇 년 사이 각종 고지서는 모바일 문자나 이메일 안내로 변경했고 그나마 종이 우편으로 받는 건 아파트 관리비 내역서, 건강검진 안내서, 구청에서 보내는 각종 신청서가 대부분이다. 모두 본인 외 개봉할 시 법적 문제가 되는 우편물들이지만, 반가운 것들은 아니다. 우리 집 등기우편배달 시간은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다. 나의 출근 시간은 오전 11시 20분. 오전 일찍 약속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 모든 우편물은 직접 받는다. 큰 방 거울 앞에 앉아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시간, 복도에서 ‘삑-’ 소리가 나면 현관 앞으로 간다. 우체부의 전자 기기에 서명을 하고, 우편물을 받고, 문을 닫고, 발신자를 확인하면 끝. H의 편지를 받은 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평소 받는 편지 봉투는 가로가 길고, 새하얀 종이라면 H의 봉투는 두툼한 기름종이에 정사각형으로 다섯 가지 실을 꼬아 만든 실끈으로 감겨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하느라 전자기기 서명에 시간이 좀 걸렸다. 세 장 분량의 편지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읽다가 눈이 멈추고, 마음을 잡은 문장은 첫 번째 장 마지막 줄에 있었다. 그 부분의 이후를 읽는 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펜으로 꾹꾹 눌러 쓴 손편지였기 때문일까. 답장을 쓰고, 보냈지만 손으로 쓰진 않았다. 발신자가 되려고 하니 감정까지 전달되어 넘쳐흐를까봐 굳이 키보드로 치고, 출력한 걸 접어 보냈다.
편지는 대화와 다르다. 발신자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정해야 한다. 간혹 쓰다 보면 이야기가 다른 길로 빠질 때도 있다. 중간에 누군가 끼어들어 정리해 줄 수도 없고, 잃어버린 길을 혼자 찾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때가 온다. 성탄절이나 새해, 생일 축하 카드처럼 짧은 내용의 편지, 주제가 정확한 편지만 쓰다가 긴 편지를 써보니 길을 여러 번 잃었다. 그래도 편지의 끝을 맺어 다행이고, 수신자는 잘 받았으니 안심이다. 종로구의 와타나베 히로코였던 그 시절 편지는 어땠을까.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단 한 글자도 생각나지 않아 낭패다. 펜으로, 연필로 눌러 썼으니 감정은 넘쳐흘러 종로구에서 의정부까지 그 경로가 다 남았을 정도겠지. 앞으로 편지를 쓸 일이 몇 번이나 더 있을까. 의정부의 후지이 이츠키, 오겡끼 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쓰.
눈길을 잡은 H의 두 문장은 글자 하나하나가 마음에 콕콕 박힌 것처럼 남아있다.
발신자 : H
(중략)
“어릴 땐 보이지 않았는데 나이 드니까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 그때마다 떠오르는 게 너에 대한 기억이야.”
(중략)
가을에서 겨울로 진입하는 환절기에 알레르기 비염으로 전쟁을 치르고 나면 그제서야 목가적인 생각을 한다. 낙엽은 이미 다 떨어져 길거리 구석구석 쌓여있고, 바람은 칼을 차고 나타나 겨울 목전에 내 발목을 툭툭 친다. 이번 겨울, 나를 찾은 건 손편지다. 와타나베 히로코와 후지이 이츠키가 주고받는 편지로 영화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러브레터>는 추운 겨울이 되면, 참았던 숨을 허공에 토해내는 와타나베 히로코의 옆모습이 담긴 포스터부터 떠오른다. 그다음 차례는 책꽂이 맨 아래칸 오른쪽에 꽂혀있는 OST 음반이다. 광화문 교보문고의 음반 코너가 지금의 만화책 코너에 있던 때, 유독 음반 코너만 어두컴컴하게 느껴지던 때, 벽면에 드문드문 청음이 가능한 큼지막하고 새까만 헤드셋이 있던 때, 한창 펜팔을 주고받던 때, 그때 그 자리에서 구입한 OST다.
왜 이번 겨울에는 펜팔과 음악, 영화가 떠올랐을까 시간을 되감아 보니 H가 보낸 등기 우편이 눈앞에 있었다. 몇 년 사이 각종 고지서는 모바일 문자나 이메일 안내로 변경했고 그나마 종이 우편으로 받는 건 아파트 관리비 내역서, 건강검진 안내서, 구청에서 보내는 각종 신청서가 대부분이다. 모두 본인 외 개봉할 시 법적 문제가 되는 우편물들이지만, 반가운 것들은 아니다. 우리 집 등기우편배달 시간은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다. 나의 출근 시간은 오전 11시 20분. 오전 일찍 약속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 모든 우편물은 직접 받는다. 큰 방 거울 앞에 앉아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시간, 복도에서 ‘삑-’ 소리가 나면 현관 앞으로 간다. 우체부의 전자 기기에 서명을 하고, 우편물을 받고, 문을 닫고, 발신자를 확인하면 끝. H의 편지를 받은 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평소 받는 편지 봉투는 가로가 길고, 새하얀 종이라면 H의 봉투는 두툼한 기름종이에 정사각형으로 다섯 가지 실을 꼬아 만든 실끈으로 감겨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하느라 전자기기 서명에 시간이 좀 걸렸다. 세 장 분량의 편지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읽다가 눈이 멈추고, 마음을 잡은 문장은 첫 번째 장 마지막 줄에 있었다. 그 부분의 이후를 읽는 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펜으로 꾹꾹 눌러 쓴 손편지였기 때문일까. 답장을 쓰고, 보냈지만 손으로 쓰진 않았다. 발신자가 되려고 하니 감정까지 전달되어 넘쳐흐를까봐 굳이 키보드로 치고, 출력한 걸 접어 보냈다.
편지는 대화와 다르다. 발신자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정해야 한다. 간혹 쓰다 보면 이야기가 다른 길로 빠질 때도 있다. 중간에 누군가 끼어들어 정리해 줄 수도 없고, 잃어버린 길을 혼자 찾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때가 온다. 성탄절이나 새해, 생일 축하 카드처럼 짧은 내용의 편지, 주제가 정확한 편지만 쓰다가 긴 편지를 써보니 길을 여러 번 잃었다. 그래도 편지의 끝을 맺어 다행이고, 수신자는 잘 받았으니 안심이다. 종로구의 와타나베 히로코였던 그 시절 편지는 어땠을까.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단 한 글자도 생각나지 않아 낭패다. 펜으로, 연필로 눌러 썼으니 감정은 넘쳐흘러 종로구에서 의정부까지 그 경로가 다 남았을 정도겠지. 앞으로 편지를 쓸 일이 몇 번이나 더 있을까. 의정부의 후지이 이츠키, 오겡끼 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쓰.
눈길을 잡은 H의 두 문장은 글자 하나하나가 마음에 콕콕 박힌 것처럼 남아있다.
발신자 : H
(중략)
“어릴 땐 보이지 않았는데 나이 드니까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 그때마다 떠오르는 게 너에 대한 기억이야.”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