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난 사람들

내가 사는 이 집은 큰 대로변 사거리에 있는 아파트다. 1970년대 초 준공된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라고 하는데 사실 최초라는 수식어는 누구나 가져다 쓰는 그런 단어고, 조금만 찾아봐도 최초라고 하기엔 좀 부족해 보인다. 어쨌거나 그 당시에는 꽤 혁신적인 건물이었다고 한다. 혁신인 만큼 값도 꽤 나갔다는 전설의 소문만 남아있을 뿐 21세기 게다가 4차산업 시대인 지금 이 건물에는 재건축을 외치는 관리소장 아저씨의 높은 목청과 불타오르는 발바닥만 있을 뿐이다. 아파트 1층에는 몇 개의 상점이 있다. 약국과 은행 사이에 있는 입구(정문)에는 가파른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올라 2층에 도달하면 본격적인 아파트의 진짜 입구가 시작된다. 그 시작점을 알리는 게 작은 수위실이다. 오래된 아크릴판에 인쇄된 ‘수위실’ 간판 옆에는 2교대로 돌아가는 경비 할아버지의 성함이 수기로 작성되어 있다. 두 분은 매일 입구를 오가는 사람을 확인하고, 택배 물건을 맡아주신다. 그 작은 수위실에는 CCTV 화면을 확인하는 모니터, 브라운관 TV, 소형 냉장고, 전화기, 책상, 의자 겸 침대로 사용하는 가구, 달력, 수건을 걸어놓는 옷걸이 정도가 있다. 수위실을 등지고 계단을 바라보면 오른편에는 우편함으로 채워진 벽이 있다. 세대별 각각의 우편함이 벽면의 반 이상을 채우고 있다. 새 우편물이 쌓이고 쌓여 휴짓조각을 담아놓은 것 같은 우편함도 있고, 매일 누군가 닦은 것처럼 깨끗한 우편함도 있다. 나의 우편함은 그 중간 어디쯤이다. 쌓아놓지도, 닦지도 않는 그 중간. 2층 지나고 3층, 4층, 5층, 층, 층을 지나… 그렇다. 70년대 혁신적인 아파트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경비 할아버지가 택배를 맡아주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집 앞 배송은 양심상 누구도 요청하지 않는 것 같다. 출근 시간에는 다다다다 뛰어 내려가는 분주한 발소리가 가득하고, 퇴근 시간에는 헉헉헉헉 천천히 옮기는 무거운 발소리가 들리는 곳. 내가 사는 이 아파트의 대략적인 이미지다.

나는 이곳의 가장 꼭대기 층, 왼쪽 끝 집에 산다. ㄱ자형 복도식 아파트라 중앙 계단에서 양쪽으로 갈라지는데 내 집은 왼편에 해당한다. 꼭대기 층에 살다 보니 반 층만 오르면 넓게 펼쳐진 옥상은 가깝게 느껴진다. 이사오기 전부터 옥상에 자주 오르락내리락 하는 상상을 했다. 옥상에 올라 입구를 등지면 왼편으로는 초대형 빨랫줄이 열 다섯개 남짓 설치되어 있다. 이불 빨래를 널기에 아주 적합한 길이다. 오른편으로는 넓게 펼쳐진 운동장 같은 공간이 있다. 옥상이 가장 분주한 때는 주말 아침인데 빨래 자리 쟁탈전이 기가 막힌다. 늦잠이라도 자면 그날 이불 빨래는 꽝이다. 정오를 기점으로 모든 자리는 만석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평일은 한산하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영향도 있겠지만, 옥상을 이용하는 사람 대부분 6층, 7층 입주민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빨래 건조 외에 옥상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뚜렷하다. 흡연, 통화, 층간소음에 영향을 주지 않는 간단한 운동. (여의도 불꽃 축제는 많은 사람이 옥상을 동시에 이용하는 유일한 날이다) 나의 경우 통화와 간단한 운동을 위해 옥상을 찾는다. 혹한이나 폭염을 제외한 애매한 봄과 애매한 가을에 주로 옥상을 찾는데 몇 년 누적이 되다 보니 옥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고정 입주민이 있다. 처음 마주쳤을 때는 쭈뼛쭈뼛 눈치도 좀 보고, 뭐 하는 사람인가 경계의 눈짓도 있었는데 자주 마주치다 보니 눈인사를 피하는 게 더 어색한 지경에 이르렀다. 올라갈때 마다 만나는 사람은 이 정도다.


  1. 매일 정각에 흡연을 위해 올라오는 깍두기 아저씨
  2. 산책을 위해 올라오는 사백이와 사백이 아버지
  3. 매일 저녁, 컵에 무언가를 담아 흡연과 함께 즐기는 앞집 청년
  4. 매일 밤, 돗자리 위에서 태블릿으로 기독교 방송을 보시는 할머니 두 분


이 중 인사를 나누는 건 1번 깍두기 아저씨와 2번 사백이 아버지다. 모르는 사람과 인사나 사담을 즐기는 성격은 아닌데 깍두기 아저씨는 나와 반대로 낯선 대화를 즐기는 분 같다. 누구나 아는 공통된 주제(설날, 추석, 아파트 누수 문제 등)가 있을 땐 긴 문장으로 말을 건넨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했지만, 여전히 부담스럽다. 옥상에 올라갈 일이 있을 땐 최대한 정각을 피한다. 아, 깍두기 아저씨의 깍두기는 ‘머리 모양’ 때문에 지은 별명이다. 사백이 아버지는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진 않는다. 사백이를 통해 애매하게 주고받을 뿐. 사백이는 작은 요크셔테리어인데 다리 수술을 하느라 사백만 원을 써서 이름이 사백이란다. 한 달 전인가 오랜만에 마주친 사백이는 오백이가 되어 있었다. 육백이가 되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랄 뿐이다. 앞집 청년은 생략하고, 돗자리 만남을 즐기는 할머니 두 분은 더운 여름밤엔 어김없이 넓게 펼쳐진 구역의 구석진 곳에 누워계신다. 한 분은 돗자리와 태블릿, 다른 한 분은 먹을거리를 들고 계셨는데 태블릿에서는 언제나 기독교 방송의 목사님 설교 영상이 나온다.

옥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생활은 처음이다. 어린 시절 산 중턱에 살았던 터라 높은 곳에 대한 환상은 없는데 건물의 옥상은 산 중턱과는 다른 느낌이다. 생생하게 움직이는 도로와 사람들, 언제나 불이 켜져 있는 역사(驛舍)의 간판은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을 준다. 덕분에 성격은 나날이 급해진다. 반면 옥상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딘가를 응시한다. 깍두기 아저씨는 집 앞 사거리를, 사백이 아버지는 사백이를, 앞집 청년은 역사로 향하는 길목을, 할머니 두 분은 태블릿을. 비슷한 주거 환경과 공간을 공유하는 이 아파트 사람들에게 옥상은 잠시 쉬는 공간인 걸까. 이런 생각은 비약인 걸까.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책은 조르주 페렉의 <공간의 종류들>이다.  


2
이따금씩 우리가 자동적으로 하게 되는 것들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 안에서;
- 이웃을 만나러 가기, 예를 들어 우리에게 공동으로 속한 벽 위에 무엇이 있나 쳐다보기, 집들의 장소적 동질성을 확인하기 혹은 부인하기. 그 동질성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알아보기;
- 누구는 A계단 대신 B계단을 이용한다는 사실, 혹은 누구는 삼층에 사는 반면 누구는 육층까지 올라간다는 사실로부터, 낯설음과 비슷한 무엇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중략)

<공간의 종류들> 74쪽, 조르주 페렉, 김호영 옮김, 문학동네


늦여름, 높은 빌딩 뒤로 해가 지던 어느 날 1번, 2번, 3번, 4번 그리고 나. 모두가 옥상 한자리에 마주친 날이 있었다. 이런 식이다. 옥상에 올라갔을 때 할머니 두 분은 이미 자리를 잡으셨고, 내가 옥상 한쪽을 빙글빙글 도는 동안 저 멀리서 사백이가 달려온다. 뒤이어 사백이 아버지가 보이고, 내가 돌던 자리를 사백이가 열심히 도는 동안 깍두기 아저씨가 올라와 담배 한 대를 태운다. 거의 다 태울 때쯤 앞집 청년이 왼손에는 컵을, 오른손에는 담배를 들고 등장한다. 할머니 두 분은 여전히 같은 자리.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각자의 시간을 쓰지만, 서로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눈치껏 살피는 시간이다. 조르주 페렉이 말한 ‘이웃을 만나기 위해’ 옥상에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없는 옥상이 더 반갑다. 높은 곳에 있는 넓은 운동장을 혼자 즐길 때 안도감은 배가 된다. 다만 동질성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몰래 구경할 뿐. 공동주택의 쏠쏠함을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