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게 쓰세요 밝게!

비가 내린다. 태풍이 온다고 한다. 늦은 오후에 우유가 필요해 동네 슈퍼에 다녀왔다. 걷고 또 걷다가 의자에 앉아 쉬기도 하고, 다시 걸었다. 우유 때문에 나갔는데 우유 덕분에 많이 걸었다. 습한 공기에 땀이 밴 옷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점심에 내려놓은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금세 배가 고파졌다. 허기가 지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한동안 잠잠했던 사람이 오랜만에 기억의 틈바구니 위로 비죽 올라온다.

오래전, 1년 남짓 신문사 칼럼에 필자로 참여했었다. 칼럼의 주제는 ‘청년의 삶과 일’. 매달 한 번, 2,000자 내외의 글이 신문과 포털 사이트에 실렸다.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면서 한 주의 칼럼을 맡는 방식. 큰 틀에서 각자 소주제를 정해 쓰고, 특집 기사가 있을 땐 한 주 밀리는 그런 기사였다. 나의 삶을 가로지르며 구석구석 틈새를 들여다봤다. 나는 청년이고, 여성이고, 프리랜서이고, 글을 쓰는 사람이고, 누군가의 딸이고 동생, 이모, 처제, 누군가의 여자친구이자 1층 아주머니에겐 윗집 처녀이고, 3층 아저씨에겐 아랫집 처자인 동시에 동네 할머니들에겐 결혼 여부가 알쏭달쏭한 젊은이였다. 좋은 것은 없었다. 기쁨의 순간은 있었지만, 삶과 일 속에서 지속해서 느끼는 안정과 행복은 보이지 않는 등 뒤의 단어였다. 누군가는 그 단어에 도달할 방법으로 결혼을 말했지만, 내가 원하는 삶의 형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무식하고 무모하게 나의 삶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밝은 내용은 아니었다. 아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쓰진 않았다. 밥숟가락 뜨기 전에 밥줄 끊기는 것이 두려워 조금은  따뜻하고, 교훈적이고, 훈훈한 태도를 섞었다. 그렇게 1년 남짓. 내 자리는 다른 필자로 바뀌었다. 담당 기자는 나를 위로한다며 1년 가까이 연재하는 건 꽤 오래 한 편에 속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우린 메신저 창에서 작별을 고했다.

균열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던 건 매번 잘 통과하던 글의 분위기와 상반될 때부터였다. 그때마다 담당 기자에게 전화나 장문의 메일이 왔다.


“결말을 조금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보면 어떨까요?”
“이번 글의 주제는 모호해서 다른 주제로 다시 부탁드려야 할 것 같아요.”


나름 변명의, 반박의 답장을 보내면 돌아오는 대답은 엇비슷했다.


“저도 알지만, 데스크에 설득해봤는데 아무래도…”


담당 기자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부장과 같이 먹는 점심밥이 맛없고, 동료에게 ‘남친’의 유무, 주말 일과에 대한 질문의 방패용 답변이 있는 삼십 대 평범한 직장인. 연재를 막 시작했을 때, 함께 점심을 먹었다. 마주 앉아 돈가스를 먹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연재에 관한 이야기보다 각자의 생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로 그녀의 회사 생활 이야기였다. 대답하기 싫은 상사의 사적인 질문들, 수십 가지 맨스플레인, 진짜 주말 일과 등등. 삶의 결은 달랐지만, 서로의 고충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남기는 ‘데스크에 설득해 봤지만’이라는 말이 고마웠다. 내가 작성한 제목이 아닌 상투적이고 교훈적인 제목으로 수정된 기사가 실려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당시 내게 중요했던 건 정기적인 수입이었다. 그리고 몇 번의 눈을 더 감았을까.

민감한 주제인 청년 실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썼다. 절친한 친구이자 취준생으로 하루에도 수백 번 나락으로 떨어지는 생활을 하던 J의 이야기를 취재하고, 썼다. 희망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원고를 넘기자마자 전화가 왔다.


“보내주신 원고 관련해 차장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해서요. 바꿔드릴게요.”


싸늘한 기분과 건너편의 서늘한 공기. 차장이었다. 긴 통화였다. 주로 차장이 말하고, 나는 듣기만 했다. 선생님에게 첨삭 지도를 받는 학생이 된 기분. 눈앞에서 빨간펜이 글자를 난도질하는 기분. 긴긴 통화에서 기억나는 말은 몇 문장뿐이다.


“글이 너무 어두워요. 우울해.”
“이건 이렇게 쓸 게 아니고, 저렇게 써야 개연성이 있지.”
“제 말대로 수정하시고! 앞으로 좀 더 밝게 쓰세요. 밝게!”


결국 기사는 데스크가 원하는 대로 제목까지 수정되어 실렸고, 포털 사이트에 업데이트되는 오전 7시부터 썩은 포도송이처럼 험악한 댓글이 줄줄 매달렸다. 하필 칼럼 하단에는 나의 사진이 함께 실렸는데 그게 좀 더 촉진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나마 가장 예의 바른 댓글이 “마주치면 면상을 갈기겠다.”라는 정도였으니까. 무참히 수정 당했지만, 읽는 사람에게 그 글은 온전한 나의 글이었다. 이미 취업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아무개가 쓴 “우리 모두 이겨내요!” 건설적인 표어 같은 글. 이후 두 번의 연재를 더 하고, 나의 자리는 다른 필자로 교체되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데스크의 풍파로부터 지켜주려 했던 담당 기자, 앞으로 밝게 쓰라던 차장, 진심으로 인신공격을 퍼붓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까지.

예상하지 못한 허기가 찾아오면 밝게 쓰라던 차장이 생각난다. 그 말이 아직 나의 손가락을 잡고 있는 걸 보면 밝은 글을 쓸 팔자는 아닌 것 같고, 묘하게 밝게 살라는 말처럼 들리는 건 자격지심인 걸까. 이런 삶과 저런 삶의 경계에 살고 있다고, 이런 삶도, 저런 삶도 아닌 곳에 사는 사람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존재로 치부하는 건 좀 치사하다.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아니라면 미등 같은 글은 어떨까. 옅은 밝기로 오래 버티는 그런 빛이라면 글공부 열심히 할 자신 있는데. 밝은 것만 보면 밝음에 언젠가는 눈이 멀 텐데. 허기가 지면 생각나는 그 차장을 걱정하는 건 너무 큰 오지랖인 것 같아 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