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꿈속으로

나는 겨울에 태어났다. 역술가 말을 빌리면 한파가 불어닥친 겨울, 혹한으로 꽝꽝 얼어붙은 바닷물로 태어났고, 점성술사의 말을 빌리면 염소-물병자리 주간(미스터리와 상상의 주간)에 태어났다. 한창 겨울에, 겨울의 절정에 태어난 것이다. 그런 이유인지 여름의 폭염은 견디기 버겁고, 겨울의 한파는 그런대로 잘 견딘다. 다른 방향으로 연결해 보면 어떨까. 여름을 싫어하는 엄마와 모든 계절을 그럭저럭 잘 보내는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유독 여름이 싫은 엄마의 체질만 물려 받은 걸까. 굳이 연결고리를 찾아 묶을 필요는 없지만, 의미를 찾다 보면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 또다시, 아니 비슷한 흐름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동서남북 뛰어다닐 수 있는 건 딱 하나. 해몽이다.

나는 꿈을 많이 꾼다. 수면 학자의 말을 빌리면 사람이 잠을 자는 동안 보통 다섯 번에서 일곱 번 정도 렘수면REM sleep  단계에 진입하는데 이때 안구는 분주하게 운동하고 뇌는 바쁘게 활동한다. 잠들어있지만, 바쁘게 잔다고 해야 하나. 바쁘게 움직이면서 꿈이 만들어지고 바로 이때 잠에서 깨면 꿈을 꿨다고 기억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 꿈을 꾸는데 기억하는 꿈과 기억하지 못하는 꿈이 있을 뿐, 꿈을 꾸지 않는 밤은 없다. 내가 꿈을 많이 꾼다고 느끼는 건 바쁘게 자고 있을 때 깨는 횟수가 많고, 수면의 질이 썩 좋지 않다는 뜻이다. 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선명한 것과 흐리멍덩한 것. 선명한 건 등장인물의 얼굴, 행동, 말투, 표정, 입고 있는 옷, 장소가 정확히 기억나고 결정적으로 웃으면서 혹은 울면서 일어난다는 것. 자주 겪는 일은 아니다. 한 달에 두어 번, 두 달에 몇 번 정도.

세부적으로 더 나눠보면 피곤함의 강도에 따라 꿈을 요란하게 꾸느냐, 몸과 정신이 동시에 괴로운 수면 마비sleep paralysis에 시달리느냐다. 즉, 가위눌림. 눈은 말똥말똥한데 누군가 내 몸을 꾸-욱 누르고 있는 불쾌한 상태. 다시 수면 학자의 말을 빌리면 렘수면 중 갑자기 깨어난 정신과 반대로 근육은 마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과학적인 설명은 충분하지만, 마비 증상이 찾아올 땐 대부분 함께 찾아오는 이가 있다. 이름 모를 영혼, 귀신들, 그들의 웃음소리. 이 현상을 처음 경험한 건 중학교 여름방학 때다. 그 시절, 방학이 되면 수도권 어디 산골에 있는 기숙형 학원에 입소했는데 (유행이었다) 아침 먹고 공부, 점심 먹고 공부, 저녁 먹고 공부, 밤이 되면 취침하는 그런 형태의 학원이었다. 복작복작한 도시에서 떨어져 공부만을 위한 곳. 외부에서 봤을 땐 그렇지만, 내부에 들어가면 공부만 하는 곳은 아니다. 삼삼오오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CCTV 사각지대를 찾아 연애도 하고, 그 틈에 공부도 하는 그런 곳이다. 낮에는 교실을 옮겨 다니며 수업을 듣다가 밤이 되면 배정된 방에 들어가 취침을 하는데 대부분 열다섯 평 남짓 되는 공간에 2층 침대가 나란히 놓여있고, 정해진 자리에서 잔다. 침대 앞에는 작은 사물함이 있어 그 안에는 목욕 용품, 속옷, 반납하지 않고 숨겨놓은 MP3 플레이어나 군것질거리들이 들어있었다. 수학여행의 기분을 한 달 내내 느낀다고 하면 되려나. 나 역시 많은 방 중 하나에 배정이 되었고, 문 앞에서 세 번째 2층 침대가 나의 자리였다. (그 이후 방학에는 방과 침대가 다른 곳으로 바뀌었지만, 첫 번째 침대는 또렷이 기억난다) 집에서는 침대 생활을 하지 않았던 터라 2층 침대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이 있었고, 1층을 선호하는 친구에게 아량을 베푸는 척 양보했다. 매일 밤 좁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앉으면 정수리가 천장에 닿는 2층에 누워 잤다. 그리고 가위에 눌렸다.

시간은 대부분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 천장이 내려앉고, 징그럽게 생긴 귀신이 나를 죽일 것 같아 무서웠던 수면 마비도 이제는 귀찮은 마음이 앞선다. 신기한 건 이 상태가 반복될수록 예지력이 함께 발달한다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모든 게 피곤함에 절여진 날에는 자려고 누우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식욕이 돋을 때 나오는 침이 아니라 치과에서 긴장할 때 나오는 침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침이 입안에 고이면 ‘아, 오늘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수면 마비의 예고편인 것처럼. “어서 오세요. 오늘은 머리 긴 귀신이 나올 예정이에요. 당신의 귀 옆에서 머리카락으로 괴롭힐 건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시길. 낄낄낄.”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예지몽이 대단하셨다. 웬만한 사건사고는 일어나기 전에 꿈으로 먼저 (예고편처럼) 보셨고, 정오가 지나면 그 꿈에 해당되는 이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하루 조심히 보내라.”는 말씀을 하셨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몇 번 경험해 본 뒤로 대충 그 말의 의미를 짐작했다. 그 내력은 엄마에게 이어졌고, 외할머니가 안 계신 지금 예고편의 역할은 엄마 담당이다. 엄마 본인의 사고를 꿈으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수술실에 실려 들어가는 꿈을 꿨는데 다음 날 아침, 매일 잘 다니던 출근길에 뜬금없이 발목이 삐어 복사뼈에 금이 가 몇 주 동안 깁스를 한 적도 있었으니까.

나의 예지몽 능력은 꽝이다. 꿈을 자세하게 기억하는 대신 내용과 반대로 흘러가는 하루가 더 많다. 꿈을 선명하게 꾸는 건 ‘영이 맑아서’라고 얘기해 주셨던 외할머니의 말이 든든한 뒷배처럼 달랑거린다. 꿈이 생생하면 피곤하지만, 하루를 더 살아낸 기분이다. 나의 하루는 48시간인 것 같은 피곤함과 희열감. 아무래도 역술가의 말보다 점성술사의 말에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꽝꽝 얼어붙은 바닷물보단 미스터리와 상상의 주간에 태어났다는 게 좀 덜 심란하기 때문이다. 꿈으로 치면 충분히 미스터리하고, 과도한 상상의 세계를 매일 오가는 거니까 점성술사에게 한 표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