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이영희

1. 9월의 어느 목요일

몇 달 만에 약속이 생겼다. 웬만한 약속들은 뒤로 미루거나 아무도 모르는 동네 뒷방 사람처럼 사적인 연락은 잠시 멈춘 채 지냈다. 그러던 중 J에게 문자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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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나 너랑 가고 싶은데 있어
나 : 어딘데?
J : 충무로역 바로 앞인데 TV에 여러 번 나왔거든. OO다방
나 : 들어 본 것 같아!
J :  여기 나중에 같이 가자
나 : 그래!
J : 안 갈 거지!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 날짜를 정하지 않으면 안 간다는 걸 아는 J는 화가 섞인 듯, 아닌 듯 답장을 보냈다.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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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이번 주 토요일에 볼까?
J : 좋아. 완전.


그렇게 생긴 약속이다. J가 말한 OO다방은 충무로역과 을지로역 중간에 있는 아주 오래된 다방이었다. 복고풍의 인테리어나 옷, 음악 등등 과거의 어디쯤이 유행으로 휩쓸고 가면서 TV에 몇 번 나왔나 보다. 무슨 다방이 오전 7시부터 운영을 하는지. 오전 11시까지는 해장라면 메뉴도 있고, 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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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 밥은 여기서 먹자. 파스타도 있고, 오므라이스도 판대.
     [링크 : 을지로3가 맛집 / 을지로 맛집 / OO맛집 위치]
나 : 그래. 그럼 예약을 하자.


식당의 위치를 찾아봤더니 자주 가는 인쇄소 골목이다. 여기에 이런 식당이 있었다고? 매번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왜 몰랐을까. 몰랐겠구나. 잘 안 보이니까. 점심이라면 사람이 많을 것이고, 줄 서서 기다리는 건 질색팔색이니까 예약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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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이번 주 토요일 12시 30분 두 명 예약 가능한가요?
? : 네. 1분이라도 늦으면 예약은 자동 취소되고요. 37도 넘으면 입장 불가입니다.
나 : 아 네.
? :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나 : 이원희요.
? : 이영희님이요.
나 : 이 - 원 - 희 - 요.
? : 네. 이영희님 토요일 12시 30분, 예약 도와드릴게요.


토요일은 이영희 하지 뭐. 본명보다 괜찮은데. 이영희. 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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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토요일 12시 30분 예약. 1분이라도 늦으면 취소.
37도 넘으면 입장 안 된대. 내 이름 잘 못 알아들어서 이영희로 예약됨.
J : 그 사람 귓구멍 좀 파야 되는 거 아니야?
나 : 귀찮아서 토요일은 이영희 하련다.
J : 온도 측정해서 28도 나오는 게 목표다.
나 : 28도면 저체온이야. 정상 온도에서 만나자.
J : 토요일에 만날 이영희 왜 이렇게 웃겨?




2. 9월의 어느 토요일

갈색으로 시들어 바짝 마른 틸란드시아가 천장 곳곳에 달린 곳에서 밥도 먹고, 다방에서 토마토 주스도 마셨다. 내가 마시는 게 흑설탕인지 토마토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달았다. 선선한 초가을 바람이 불고, 다방에는 우리뿐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폭 들어간 계산대 안에서 요지부동. J의 옆에 열려있는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J만 시원하고, 나는 더웠다. J는 냉커피를 시켰는데 커피는 다 마시고, 얼음이 조금 남아있을 때쯤 물컵의 물을 커피잔에 부었다. 그 물까지 다 마신 J는 두 모금에서 멈춰버린 내 토마토 주스를 봤다.


(다방)
J : 왜 안 마셔?
나 : 너무 달아. 심각하게 달아.
J : 맛있는데?
나 : 너 다 마셔.


분당에 사는 J는 20년 전부터 나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온다. 우리의 약속은 언제나 오전 11시, 세종문화회관 앞 버스 정류장. 지금은 나보다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30분, 40분, 1시간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서 화를 내거나 토라져 안 만나는 일은 없었다. 나를 보러 와준다는 게 대단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를 보러 오는 건 여전하다. (내가 분당에 간 적도 있다. 두어 번.) 광화문 교보문고 푸드코트에서 볶음밥을 먹고, 경복궁에 들어가 제일 한적한 곳에 앉아 미주알고주알 학교 얘기, 선생님 얘기, 학원 얘기들을 했다. 그때 우리의 놀이터였다. 학교도 다르고, 사는 지역도 다른 우리는 신기하게도 같은 반 친구들보다 가까웠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는 문자를 주고 받고,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난 첫 주말에는 광화문에서 만났다. J가 5년 정도 영국에서 생활하던 이십대 초반에도 우리는 언제나 메신저를 주고받았다. 자아가 무거워서 휘청거릴 때, 그 자아가 실현되지 않아 으스러질 때마다 서로의 옆에서 지켜봤다.


(대화)
나 : 야 너는 왜 항상 나한테 좋은 이야기만 해? 진짜 내가 좋은 사람 같잖아.
J : 너 그거 착각이야. 내가 좋은 것만 이야기하니까 그렇지.
나 : 그럼 나쁜 점도 이야기해 줘. 고칠게.
J : 너는 봄에 연락하면 바쁘다 하고, 여름에 연락하면 덜 더울 때 만나쟤. 가을에 연락하면 무슨 마감중이라 못 만나고 겨울에 연락하면 추위가 누그러지면 만나쟤. 저번에는 그러더라? 코로나 끝나면 만나자고. 그냥 만나지 말자는 거지. 몇 년 전인가. 그 시기에는 전화도 잘 안 받고, 어떻게 연결이 되서 통화를 해도 뭔가 이야기가 잘 안 되는 거야. 그래서 한동안 전화를 안 했어. 해도 안 받겠지. 받아도 그냥 그렇겠지. 처음에는 좀 씁쓸했지.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그냥 내려놨어. 아 쟤는 원래 저런 애구나.




3. 이름은 이영희

이영희로 식당을 예약하고, 제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체온을 확인하고, 예약자명을 말했다. 안내자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토요일에는 이영희 하면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는데 막상 다른 이름을 말하려니까 떨렸다.

“이여언엉희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10월이 되면 J는 증평으로 간다. 직장때문인데 새로운 지역에서 적응도 해야 하고, 일도 바빠지면 지금보다 만나는 건 더 힘들 거다. 그래서 서둘러 만났다. 메신저 대화는 쉬지 않고 시끄럽겠지만, 얼굴 보는 건 힘들겠지. 광화문 한복판에서, 오가는 사람이 많은 길목에서 J는 큰소리로 여러 번 물었다.


(대화)
J: 너 증평에 나 보러 올 거야? 진짜 올 거야? 너 안 올 거지!
나 : 안양 살던 아는 언니가 매번 나보고 놀러 오라고 했었거든? 근데 그 언니가 3년 뒤에 이사할 때 그러더라. 온다고 온다고 하던 이원희는 결국 나 이사할 때까지 안 왔다고. 야 근데 증평 갈게. 나 진짜 갈거야.


언제나 진심.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간다고 한 내 마음도 진심, 말도 진심이다. 나를 받아준 J는 안다. 그러니까 나를 내려놨다고 했겠지. 나라면 나 같은 애랑 친구 안 한다는 말에도 별다른 내색하지 않았겠지. 움직이기 위해서 마음의 힘이 필요한 이원희라서 못 가는 거지. 내가 이영희라면 왠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도 이영희 하지 뭐. 내뱉을수록 마음에 드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