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내리며 생각한 것

원두를 갈아 기구를 이용해 내려 마신 지 7년 정도 되었다. 나의 첫 번째 가족에게서 독립했다는 얘기다. 완전히 독립한 건 5년 차다. 2년 정도 주거의 형태와 방식에 과도기가 있었고 정착한 건 5년. 도합 7년이다. 과도기를 함께 했던 동거인이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었고,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눈곱 낀 눈으로 그라인더에 원두를 털어 넣고, 각종 도구를 착착 꺼내 뜨거운 물을 주전자에 담아 원을 그리며 붓는 모습에 반해 그때부터 아침이 되면 같은 행동을 한다. 몇 년 해보니 커피를 마시기 위한 행동이라기보다 잠을 깨기 위함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커피를 마시면 카페인의 각성효과 덕분에 잠에서 깬다고 생각하지만, 커피를 내리기 위해 도구를 준비하면서 서서히 잠에서 깨는 거다. 커피물을 데우는 것처럼 잠을 깨기 위해 서서히 몸을 데우는 것. 뜨거운 물이 필터를 통해 조르르 커피로 내려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는 게 첫 번째 일과다. 기구에 따라서 행동도 달라진다. 빈번하게 사용하는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1. 핸드 그라인더
  2. 케멕스
  3. 드리퍼와 서버
  4. 커피메이커
  5. 커피핀과 서버
  6. 프렌치프레스


전동 그라인더가 망가진 뒤로 핸드 그라인더만 사용한다. 잠에서 확실히 깰 수 있는 첫 단계. 원두를 손으로 갈아야 하니까 정신이 든다. 이때 원두가 라이트 로스팅이라면 약간의 짜증이 올라온다. 너무 안 갈리니까. 케멕스는 드리퍼와 서버를 하나로 합친 디자인이라서 편리하다. 작은 천장 등의 실루엣처럼 생긴 종이 필터를 세 번 접어 깔때기로 만들면 끝. 누가 내려도 맛이 좋고, 나무로 된 손잡이가 플라스틱 서버의 손잡이보다 따뜻한 느낌이다. (커피가 뜨거워서 따뜻하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드리퍼와 서버 세트는 최근에 깨졌다. 며칠 전 그릇장을 옮기다가 안에 있는 그릇들이 앞으로 쏟아져 와장창 깨진 적이 있는데 그날 드리퍼도 그릇장에 있었다. 서버는 앞서 설거지통에서 깨졌다. 오전에 케멕스로 내린 커피를 마시면 오후에는 커피메이커로 내린다. 오후에 마시는 커피는 대부분 일하는 틈에 잠을 쫓기 위함이다. 후다닥 내려야 한다. 요즘에 사용하는 건 멜리타의 아로마보이와 브라운의 아로마스터. 아로마스터의 사용량이 좀 더 높다. 대용량이고, 흰색이고, 최근에 샀다. 나의 모든 사용 빈도는 구매 시기와 비례한다. 최근에 산 걸 더 많이 사용한다. 도구를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1. 핸드 그라인더 (매일 사용)
  2. 케멕스 (매일 사용)
  3. 커피메이커 (아로마스터 > 아로마보이)
  4. 커피핀과 서버 (가끔 사용)
  5. 프렌치프레스 (창고에 있음)
  6. 드리퍼와 서버 (없음)


커피핀은 베트남 여행 때 샀다. 작은 크기의 스테인리스 컵과 받침, 뚜껑이 세트다. 바닥 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그 구멍을 통해 추출된다. 혼자 마실 때 좋다고 하는데 커피핀에는 부속품이 많다. 그 말은 설거지해야 할 게 늘어난다는 뜻이고, 사용 빈도가 낮다. 동거인은 혼자 마셔야 할 때 케멕스 위에 커피핀을 올리고, 작은 종이 필터에 원두를 부어 추출한다. 두 개를 합치면 어딘가 모르게 길고 얇다. 팔꿈치로 살짝 건드리면 커피핀이 툭- 떨어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프렌치프레스는 어떨까. 유일하게 종이 필터가 필요 없는 도구다. 원두를 바로 통에 넣고, 뜨거운 물을 천천히 여러 번 나눠 붓고 나무 막대로 휘휘 저어준다. (방법은 다 제각각이다) 조금 기다렸다가 프레스 겸 뚜껑을 바닥까지 쭉 누르면 끝. 텁텁한 커피가 완성된다. 다 마시고 나면 통에 남은 원두 찌꺼기를 버리는 게 가장 귀찮다. 창고에 있는 이유가 있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원두 봉투를 들고 그라인더 뚜껑을 열고 세 스푼을 담아 갈았다. 가만히 서서 가는 건 지루해 선반 위에 있는 식물들을 둘러봤다. 밤사이 누가 자라고 누가 죽었나. 멕시코 소철의 새잎은 눈에 띄게 길어졌고 아무렇게나 삽목한 가을 국화는 비실비실하다. 조만간 정리하거나 물꽂이로 방향을 바꿔야겠다. 원두를 다 갈면 물을 끓인다. 끓는 동안 생각을 한다. 바쁘게 사는 것도, 느리게 사는 것도 괜찮다고. 바쁘게 살면 바쁜 만큼 틈 안으로 새어들 생각이 없고, 느리게 살면 뭘 버려야 할지 감이 온다. 뒤도 돌아보고, 친구 생각도 하고, 밥도 직접 만들어 먹는다. 그중에 제일은 이렇게 커피를 내릴 시간이 있다는 것. 다 내린 커피를 잔에 옮기고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을 보거나 읽다 만 책을 펼칠 수 있다는 것. 시간이 나를 기다려주는 기분이다. 맛있는 커피라는 게 그런거 아닐까. 커피와 내가 같은 시간을 나누고, 이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느끼는 것. 이 평화로움을 지키려고 분투하며 산다.